향수 병은 이상하게 사람을 빨리 설득한다. 사진으로 볼 때는 이미 책상 한쪽에 올려둔 장면까지 떠오른다. 이름도 예쁘고, 병도 예쁘고, 설명도 멋있으면 마음은 거의 결제 직전까지 간다.
그런데 향수는 사진으로 사면 안 되는 물건에 가깝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시향지에서 좋았던 향이 손목에서는 이상하게 달게 올라오기도 하고, 처음엔 평범했는데 퇴근길 옷깃에 남은 냄새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풀보틀을 바로 사지 않으려고 한다. 정말 마음이 가는 향일수록 디캔트나 작은 용량으로 며칠 써본다.
내가 디캔트로 확인하는 것
| 확인하는 것 | 왜 보는지 |
|---|---|
| 첫 10분 | 탑 노트가 내 취향을 너무 쉽게 속이는지 본다. |
| 1시간 뒤 | 미들 노트가 생활 속에서 편한지 본다. |
| 3시간 뒤 | 베이스 노트와 잔향이 옷이나 살에 어떻게 남는지 본다. |
| 다음 날 | 다시 뿌리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지 본다. |
향록 향수 입문 가이드에서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를 설명한 부분을 보고 나서 이 흐름을 더 의식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냥 "처음 향"과 "나중 향"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시간별로 조금 나눠서 적어본다.
첫날에는 판단하지 않기
처음 뿌린 날에는 거의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첫 향은 사람을 너무 쉽게 들뜨게 한다. 좋으면 바로 사고 싶고, 별로면 바로 지우고 싶다.
그런데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얼굴이 나온다. 처음 10분이 예쁜 향보다, 두세 시간 뒤에도 내 옷에 남아 있을 때 싫지 않은 향이 더 오래 간다. 향수 사용 후기를 적을 때도 그래서 첫인상만 쓰지 않으려고 한다.
양을 줄였을 때 좋아지는 향
처음에는 향이 마음에 들면 한 번 더 뿌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향은 덜 뿌렸을 때 훨씬 좋다. 특히 머스크나 앰버처럼 몸에 붙는 느낌이 있는 향은 가까운 거리에서 은근히 남을 때 더 편했다.
향수는 존재감을 보여주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리감을 조절하는 물건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좋다고 남도 같은 세기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요즘은 손목에 한 번, 아니면 옷 안쪽에 아주 조금으로 먼저 본다.
좋아하는 향과 자주 쓰는 향은 다르다
이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멋있는 향이 꼭 자주 손이 가는 향은 아니었다. 맡으면 감탄하게 되는 향이 있는데, 막상 아침에 나갈 때는 부담스러워서 손이 안 간다.
반대로 처음에는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향이 계속 생각날 때도 있다. 씻고 나온 뒤, 가벼운 옷을 입고, 별일 없는 날에 뿌리고 싶은 향. 그런 향이 실제 생활에는 더 오래 남는다.
디캔트를 쓰면서 보는 건 결국 이 부분이다. 내가 이 향을 좋아하는지보다, 내 생활에 들어올 자리가 있는지.
나에게 묻고 답하기
Q. 시향지에서 좋으면 바로 사도 될까?
A. 나는 이제 바로 사지 않는다. 시향지는 첫인상을 보기 좋지만, 피부에서 달라지는 부분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최소한 손목에 올려보고 몇 시간 뒤 잔향까지 본다.
Q. 디캔트는 구매를 미루는 일일까?
A. 예전에는 그렇게 느꼈다. 지금은 실패를 줄이는 시간에 가깝다. 풀보틀을 사기 전에 며칠 써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지만 자주 쓰지는 않을 향"을 꽤 걸러낼 수 있었다.
Q. 향수 사용 후기는 무엇을 적어야 할까?
A. 멋진 표현보다 생활 질문이 더 도움이 됐다. 오늘 날씨에 괜찮았는지, 실내에서 계속 맡아도 편했는지, 다음 날 또 뿌리고 싶은지. 이 세 가지가 나에게는 제일 잘 걸러졌다.
며칠 써보고 적는 체크리스트
- 오늘 날씨에 괜찮았는지
- 실내에서 계속 맡아도 편했는지
- 옷에 남은 냄새가 좋았는지
- 다음 날 또 뿌리고 싶었는지
- 큰 병으로 사도 질리지 않을지
- 향록 위키에서 본 계열과 실제 느낌이 비슷했는지
아주 단순한 질문인데 꽤 잘 걸러진다. 특히 "다음 날 또 뿌리고 싶은지"가 중요했다. 첫날의 설렘은 강하지만, 둘째 날에도 손이 가는 향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다시 열어볼 링크
지금은 천천히 사는 쪽이 마음에 맞다. 향수는 병 하나를 사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 생활에 냄새 하나를 들이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며칠 늦게 사도 별로 손해가 아니다.